어느 날 문득 든 생각이, '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게 뭐였지?'였다.
어릴 적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고, 워낙 이곳저곳 많이 나오니까 안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해서, 생각난 김에 하나씩 도장깨기 느낌으로 보기 시작했다.
붉은 돼지
- 어떤 이유로 돼지가 되어버린 남자, 라는 이야기가 꽤나 흥미로운 설정이었는데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아닌 듯 하다. 이탈리아의 생소한 역사적 배경, 미남 캐릭터 없음-_- 허세 쩌는 남자들, 돈 벌러 도시로 떠난 남자들의 자릴 대신하는 여자들, 그리고 시니컬한 돼지.
나중에 찾아보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행기를 엄청 좋아해서 그걸 원없이 그려 넣은 작품이 이 '붉은 돼지'라는데, 그 말처럼 다양한 비행기가 나와서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아주 흥미로운 작품일 듯 싶다.
추억은 방울방울
- 이 작품을 보면서 현재와 추억이 너무 교차편집으로 나오고, 연관도 없이 뜬금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. 근데 이걸 다 보고 그날 밤 자려는데 갑자기 중학생 때 기억이 나는 거다.
내용인 즉, 시험날 점수가 잘 안나왔는지 속상해 하는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’그래도 나보다 잘 봤잖아‘라고 말했는데, 친구 왈 ’왜 너보다 잘 봤다고 해?‘ 라고-_-;;
뭐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런 나와 본인를 비교하여 위로(?)하는 것이 불쾌했나보다 하고 나중에 생각했다. 그 뒤론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조금 쓰린 기억으로 남아있다.
그래.. 기억, 추억이란 게 이렇게 맥락없이, 뜬금없이 떠오르는 거구나..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의 전개를 납득했다.
중간에 타에코와 토시오가 짝자쿵이 잘 맞길래 '둘이 뭔가 있겠군' 싶었는데, 막판에 그렇게 엮을 줄이야... 물론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, 할머니가 얘기 안했으면 그냥 저냥 흘러갔을까? 아니면 시간이 한참 지나 알게 됐을까? 어찌됐든 등 떠밀려 간 느낌이 들어 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.
귀를 기울이면
- 도서카드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상상해볼 법한 하이틴 로맨스.
짝사랑, 공부 고민, 꿈... 그 나이대에 경험한 것들을 다루다보니 공감도도 높아서 세월이 흘러도 인기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.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이 애니메이션 주인공 답게 잘 생김 ㅎㅎㅎ 이름도 넘 이쁘다ㅎㅎ (일본에서 실사화로 영화를 만들었던데, 과연...)
모노노케히메
- 요즘같이 환경 문제가 글로벌 화두인 때에 참 다시 보기 좋은 작품.
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, 생각보다 잔인해서 놀랬다;;;; 전쟁씬에선 아주 과감하게 머리, 팔 등이 잘려나가는 데다, 재앙신이 된 거대한 동물들의 표현이 기괴하기까지 느껴졌다.
머리가 잘린 사슴신이 다시 머리를 되찾았을 때 숲과 산에 식물들이 새롭게 자라나는데, 이 모습을 보며 인간을 죽일 수도, 살릴 수 있는 것도 결국 자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.